안녕하세요 시골아빠입니다.
이번주도 어김없이 집에서 영화만 봤습니다.
정은경 본부장님께서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집에 짱박혀 있으라고 하셔서
무서워서 못 돌아다니겠더군요!
혼날까봐...
천문은 장영실과
세종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역사드라마라고 하면 뻔하고 재미없을걸로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지금까지 안봤거든요!!!
그런데 한번 보기 시작하니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적절히 가미한 개그 코드가
제 스타일의 완전 딱 맞는 영화였습니다.
등장인물은 대한민국 최고의연기자들이 맡았네요!
장영실의 최민식 세종역에 한석규!
둘을 바꿔 놓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최민식이 왕을 맡는건...
상상이 안가네요 ㅎㅎ
대호군 장영실에 대한 간단 소개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9월 16일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에서 귀화하였고
장영실의 어머니는 동래현(지금의 부산)의
기녀였을거라고 추측한다.
장영실의 모친이 정설부인이 아니었기에
장영실은 동래현(지금의 부산)의
관노가 되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영화 천문의 가장 첫 장면입니다.
장영실은 안여 만드는것을 감독하였는데
세종이 안여를 타기도 전에 부러졌습니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곤장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사헌부의 탄핵이 올라오자 세종은 망설이다가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 대해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곤장 100대 형을 80대로 감해 준 것뿐이었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지만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했을때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주장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를
보신다면 사실과 허구를 가려내면서
한층 더 재미있게 보실수있습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조선의 것으로
조선에 맞는것을 만들면 됩니다.
장영실의 이 한마디가 세종의 정치 이념과
딱 맞아 떨어지며 이영화의 의의를
한 문장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분체계는 조선의 근간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과인은 재주 있는 자에게 관직을
내려 이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오"
"백성들의 성품을 교화시킬수없다면
그대들은 정치를 왜 하는것이오?
단지 백성들 위해 군림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기 위함인가?"
조선의 관리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놀랐습니다.
"명나라 절기가 우리나라와 맞지 않아
씨를 뿌리고 거두는데
아주 애를 먹고 있다고 하더이다
우리땅에 맞는 우리의 절기를 과인이
한번 측정해보려고 하는데..."
"하늘을 여는 천문 역법은 명나라
황제만이 다를수있는 것이옵니다."
조선의 관리라는 사람들이
저때부터 나라를 망해먹었군요!
"한양이 남경(명나라 수도)보다
반시진 빠르옵니다."
"이제야 우리도 우리땅에 맞는
조선의 시간을 갖게 됐다"
이렇게 조선은 세종과 장영실이 아니었다면
자주국가로서의 꿈을 꿀수없었을겁니다.
역사와 영화의 다른점
장영실은 세종이 아닌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발탁되었으며 장영실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간의를 만든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세종이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
각종천문기계를 눈으로 익혀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어찌보면 명나라의 천문학을
조금은 응용하였다고 볼수있습니다.
또한 이천은 실제로는 무신출신 과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천문의기 제작사업의
총감독 책임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천은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참고 사항
1442년 장영실은 곤장 80여대를 맞고
1443년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444년뒤 최초의 천문역서 칠정산이 편찬되었고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준호형 많이 늙었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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